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명 6/등장 문명/일본 (문단 편집) ===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 ||<-3> [[파일:Japan2.png|width=40]][br]{{{#F9F9F9 {{{+2 '''도쿠가와'''}}}[br]'''Tokugawa'''}}} || ||<-3> [[파일:문명6_도쿠가와.png|width=100%]] || ||<-3> '''인용문''' || ||<-3> ''"난 지금보다 더욱 강해질 수 있다고 보네. 허나 난 오랜 인내를 통해 지금의 내가 되었네. 내 후손이 이를 본받으려 하거든, 마찬가지로 인내를 터득해야 할 걸세."''[br](儂は今より強くなれると思うが、長い忍耐が今の余を作ったのだ。子孫も強くなりたいなら、忍耐を覚えなくてはならん。)[* 도쿠가와 이에야스 자신이 남긴 말은 아니며, 후손인 [[도쿠가와 이에히로]]의 말의 일부를 살짝 변형한 것이다. ] || ||<-3> '''소개''' || ||<-3> 위대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시여, 당신은 인내하는 칼날이 급소를 찌른다는 것을 잘 아는 분이십니다. 국내외의 강탈자에게서 신중하게 조국을 지키고 백성의 근면함과 지혜를 믿으십시오. 믿을 수 있는 건 백성뿐입니다. 통치의 임무는 길고 그 짐은 무겁지만, 검 위에 손을 얹은 지금 불평하거나 절망할 틈은 없습니다. || || '''지도자 특성''' || [[파일:문명 6 도쿠가와.png|width=50]][br]'''[[번(제후국)|{{{#525252 막번체제}}}]][br](Bakuhan)''' ||국제 교역로의 생산량과 관광이 -25% 감소하지만, 국내 교역로에서는 목적지 도시에 있는 전문 특수지구당 문화 +1 및 과학 +1, 금 +2를 제공합니다.[br]일본의 수도에서 6타일 이내에 있는 도시는 충성심이 100%이고[* 오리지널 룰셋(일반 규칙)에서는 충성심 100% 대신 쾌적도 +4를 받는다.] 비행을 연구한 뒤에는 특수지구마다 관광 +1을 받습니다. || || '''안건''' || '''쇄국정책[br](Sakoku)''' ||정복으로부터 안전하게 지내고 싶어 합니다. 다른 플레이어의 최초 수도를 정복한 문명을 싫어합니다. || ||||||<:>{{{#!folding [ 역사적 배경 펼치기/접기 ]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이자 정치가로, 혼란스러운 일본 센고쿠 시대의 패자이자 그 후에 찾아오는 에도 시대의 설계자입니다. 일본 역사에서 센코쿠 지다이, 즉 센고쿠 시대의 혼돈은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어진 에도 시대의 번영과 평화 속에서 사무라이는 위대한 전투와 지도자, 닌자니, 군대니, 공성전이니 하는 센고쿠 시대의 이야기로 서로를 즐겁게 하는 일 외에는 거의 할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봉건제 일본이라 하면 으레 떠올리는 이미지 대부분이 이렇게 미화되고 낭만적으로 꾸민 이야기의 산물입니다. 센고쿠 시대는 권력을 추구하는 라이벌 가문 간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습니다. 약한 아시카가 막부는 무너졌으며, 이에 따라 천황은 단순한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게 되었고 천황의 수호자인 쇼군의 지위는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한 세기 이상 라이벌 다이묘(지방 영주)와 사무라이가 쇼군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습니다. 이 싸움에는 유럽인의 머스킷으로 무장한 기독교인, 군주에 반기를 든 잇코잇키, 명예에 대한 개념이라고는 없는 군사 전략가로서 영주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닌자 등 다른 요소도 있었습니다. 센고쿠 시대의 무대에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 세 명의 사무라이가 주역으로 출현합니다. 이러한 지도자들의 개성과 동기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세 사람이 함께 앉아 있고 그 앞에는 노래하려 하지 않는 작은 새가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오다는 위협으로 시작합니다. "두견새야, 울지 않으면 죽이겠다." 히데요시는 새를 조종하려 합니다. "두견새야, 울지 않으면 울려 보이마." 하지만, 가장 영리한 도쿠가와는 간단하게 말합니다. "두견새야,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마." 여기서는 인내심과 냉철한 두뇌가 승리합니다. 그리고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육천마왕' 오다는 그 이름대로 살았습니다. 오다 가문의 당주로서 노부나가는 군대를 모아 일본 본토를 휩쓸며 잇코잇키를 무찌르고 아시카가 막부를 완전히 몰아냈습니다. 마지막 남은 장애물은 강력한 서부의 일족인 모리 가문이었는데, 오다 가 내부의 배신만 아니었다면 이 역시 물리쳤을 것입니다. 교토의 한 절(혼노지)에서 비교적 무방비 상태로 차를 마시다가 자신에게 반역한 장군 아케치가 다가오는 걸 본 오다는 자결했습니다. 미래에 쇼군이 되는 도쿠가와도 당시에는 사무라이였던 닌자 핫토리 한조와 함께 도망쳤습니다. 오다의 깃발을 이어받은 다음 가문은 도요토미였습니다. 과거 오다의 가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깃발을 차지하고 일시적인 지배권도 거머쥐었습니다. 확실히 히데요시의 치하에서 일본은 한국을 점령하려 했으며, 그게 마지막 시도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왕도 죽는 법입니다. 히데요시 또한 예외는 아니었으며, 그가 주력한 해외 확장 덕분에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뒤따라 오다의 지역 가신 일족으로 형성된 도쿠가와 휘하의 도쿠가와 가문과 충성파 가문 간에 위기가 이어졌습니다. 그 절정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는 우세를 점했으며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엉망이었습니다. 백성이 통치한다는 개념의 공화주의와 기독교 같은 새로운 개념이 홍수처럼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총과 유럽 무역도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도쿠가와는 사코쿠, 즉 쇄국을 단행하여 이를 단독으로 중단시켰습니다. 나가사키를 제외한 일본의 국경은 폐쇄되었습니다. 도쿠가와는 쇄국을 통해 신 도쿠가와 막부에 도전하는 새롭고도 위험한 문제가 유입되는 것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히데요시가 재정적 위기에 처하게 된 해외를 향한 모험도 끝을 냈습니다. 쇄국정책은... 일본에 있어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지역 생산력은 증가했고 막부 근거지의 이름을 딴 에도 시대에 일본은 평화롭고, 번영했습니다. 그리고 이웃 국가들은 이제 사무라이가 해안에 나타나는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시의 통제 체계는 잔인했습니다. 여전히 귀족은 존재했지만, 도쿠가와에게는 그들을 통제할 기발한 전략이 있었습니다. 귀족이 근거지를 다스리고 그 가족은 일종의 인질로 에도에 남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반란이 일어나면 단순히 그 가족을 위협함으로써 즉시 반란을 진압할 수 있다는 의미였고, 에도의 궁정이 커진다는 뜻이었습니다. 지루했지만 부유했던 사무라이는 이야기를 했고, 전사 지망생은 땅 대신 명예를 놓고 결투를 벌였습니다. '떠다니는 세상의 그림'이라는 뜻의 우키요에가 이때 성장했고 이와 관련된 예술가와 작가 또한 동시에 성장했습니다. 쇄국은 1800년대에 무역을 요구하는 미국 선박의 도착(출항하지 않겠다는 위협이 주요했던)과 함께 끝났습니다. 일본은 세계가 일본 없이 발전했으며 총과 대포 같은 무기가 상당히 위험해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개국이 충격적이었지만, 이어지는 메이지 시대에는 일본 봉건제의 수많은 부분이 폐지되었으며, 메이지 유신이 수십 년 내에 세계 최강국들과 맞서고 물리칠 수 있는 인프라는 이미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